추수감사 간증 -구성중앙교회 김영란집사- (2021. 11. 14.)
먼저 늘 한없이 깊으신 사랑과 은혜 주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 올리고 이렇게 귀한 간증의 자리를 마련해주신 담임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성경 방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과 그 마음을 알아가며 성경읽기와 묵상을 꾸준히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담임목사님과 사모님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처음엔 ‘셀톡방 성경 읽기 진행도 어려운데, 성경방과 일독을 꾸준히 할 수 있을까…?’싶었는데 목사님, 사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성경방한 것이 올 해 가장 잘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성경 속 군중이 되어 그 상황을 바라보자, 감히 근접도 못 할 것 같았던 ‘믿음의 사람’이 그 믿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닌, ‘인간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나갔기 때문이란 걸 배웠습니다. 제게 영웅담 혹은 신화 같았던 성경 말씀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닌,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께선 대단하고 뛰어난 자를 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외되고 낮은 자를 더 귀히 여겨주시고 키워주십니다. 상한 갈대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 끄지 아니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꿰뚫어 있는 인간사입니다. 인간에 불과한 제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헤아릴 순 없겠지만 저를 향한 모든 선한 계획을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태에 지어지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선포해주시고, 제가 제 자녀를 제 것인 양 욕심 부릴 땐 ‘네가 내 것이듯이 네 자녀도 내 것이란다.’ 일깨워주신 주님. 아무리 제가 부족하고 못나도, “평생토록 이 땅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찬, 은서를 위해 기도할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라며 믿고 맡겨주심 감사합니다.
예전에 제겐 성경말씀이 ‘어렵지만 좋은’ 말씀이었다면, 지금은 ‘살아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고백’이심을 깨닫게 해주신 기쁨과 감격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요.
이젠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차오릅니다.
첫 번째 간증하기 전까진 수시로 통장잔고 보기에 바빴지만, 더 이상 통장 따위는 보지 않습니다. 천하 만금보다도 더 귀중하고 생명 되신 주님 말씀 보기에도 바쁘니까요.
제 삶의 전부가 곧 주님의 증거라서, 지금 제가 숨 쉬는 순간도 온전한 주님의 은혜임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제 삶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제가 아무리 제멋대로 삐뚤어지고 엇나가려 해도 주님께선 결코 저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굳게 붙잡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주님의 사랑에 매인 자됨이 참으로 영광스럽고 감사합니다.
저는 언제나 주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며 ‘그래도 이 정도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잘했다 칭찬해주시겠지?’라고 우쭐대기도 했습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말씀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이신 절대주권자 주님에 대해 먼저 묵상하고 감사드리기보단,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에 취해서, 주님보단 제 성취, 제 능력과 자존심을 먼저 앞세웠습니다. 주님께 도우심을 구한다 하면서도 주님을 제 인생의 ‘주인’으로서가 아닌, ‘보조자’로 밀어놨습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과 사람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으로 어떤 일에 있어 그 마지막 마무리까지 예측 계획하며 통제될 때 보람을 느꼈습니다. 끝까지 해낼 자신이 없다면 ‘아…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라고 보류하기 바빴습니다.
‘나 정도면 성실하고 착하고 괜찮지 않나?’ 왠지 ‘죄인’이라는 단어와는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만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제가 느낀 모든 어려움들은 제 자신을 철저히 깨부수고 주님 앞에 내려놓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그 말씀은 제게 용기와 담대함과 힘을 북돋아주시기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아 회개하고 자족과 겸손을 소망하게 해 주시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남들처럼 심신과 믿음이 굳지 못하고 연약한 것이 늘 창피하고 싫었는데, ‘만약 내가 굳건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선 이런 저조차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봐 주시고 온전히 받아주셨습니다. ‘내가 너의 모든 마음과 노력을 안다.’ 저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주님. 주님의 그 온전한 사랑의 눈길과 손길을 깨달은 순간 대성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 기쁨과 열정으로, 주님 말씀으로 채워지는 삶은 또 어찌나 기쁜지요.
그동안은 ‘부모님께서 나를 낳으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니까’ 제게 주어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더 받지 못함에 아쉬워했습니다. 욕심이 죄를 낳는 줄도 모르고 더 많이 가지면 행복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님 말씀 외엔 우리 인생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어떤 복을 내리시든 그것은 온전한 주님의 은혜임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순종할 때조차 완전하지 못하고, 최선을 다할지라도 하나님께 상 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고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이 연약함으로 인해 주님께 제 인생을 맡기고, 사람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깊어질 수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예전엔 제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기 바빴다면, 이제는 주님께선 우리가 방황할 때조차 마치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길 기다리듯 오래 참으시고 늘 애타게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기에, 저 또한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고, 여러 힘든 상황으로 나아오지 못하는 분들 또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저도 주님의 사랑에 매여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으니, 당신은 더 잘 이겨내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선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세요! 야!나두! 야!너두!”
제가 부모로서 가장 기쁘고 감격스러울 때를 생각해보니, 은찬, 은서가 무엇을 잘하거나 뛰어날 때가 아닌,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할 때와, 순종할 때였습니다. 아이를 혼 내키고 너무 속상한 마음이었는데 은서가 강아지 표정으로 “엄마, 제가 어젠 힘들다고 엄마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말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함이 몰려오며 “아니야, 엄마도 너무 화내서 미안해.” 사랑의 포옹을 하게 됩니다. 걸핏하면 혼내는 엄마라도 “괜찮아요.”라며 용서해주고 오히려 제게 “태어나줘서 고마워요.” 라고 말해주는 은서를 보며 ‘너무나 부족한 나를 어떻게 이렇게나 사랑해줄 수 있을까…….’ 이 안에서도 무조건적인 주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예전엔 제가 힘든 것 때문에 눈물이 났지만, 저의 죄성의 밑바닥까지 봐보니 저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요, 주님의 십자가 보혈 없이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는 참으로 악한 죄인이구나.’ 깨달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으로 인하여 눈물이 납니다. 주님 앞에서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생각을 했다는 것조차도 죄이므로, 안 좋은 감정을 품은 상대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단 것을 깨달았습니다. 솔직히 제가 말하지 않으면 저의 그 지질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제 자신이 알고,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아시기에 정직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는 게 옳았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15)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음은, 자식이 그 부모의 모습과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아처럼 버려지고 문제아 같던 아이도 ‘한 사람’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달라지는데, 주님의 사랑과 말씀 안에서 성령의 새사람으로 거듭난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가르침을 따라 성결해집니다.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코람데오. 매 순간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나중’은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 아니면 소용이 없습니다. 부모님께서 우리를 기다려주시던가요? ‘나중에 효도해야지.’가 무슨 소용일까요. 예배 자리에 나아갈 힘이 있고, 찬양과 경배, 기도드릴 힘이 있을 때 예배의 자리를 생명같이 지켜야합니다. 주님이 주신 그 귀한 자리와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에 날마다 ‘주님, 저의 죄성을 이기게 도와주세요.’ 울부짖어야 합니다.
사실 작년부터 올 해초까지의 시간은 제 인생에 최대 위기라고 할 만큼 위태롭고 심각한 어둠의 시간이었습니다. 은서가 아토피로 밤새 어찌나 심하게 긁던지 살이 갈라지고 찢어져 아침이면 그 피로 물든 옷과 이불을 빨면서 울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밤엔 은서 팔을 붙잡고 지켜야 했고, 낮엔 코로나로 집에 있게 된 은찬이를 신경 쓰느라, 매일 2~3시간도 제대로 못 자고 멍하게 늘 각성 상태처럼 있게 되자 몸과 마음이 급격하게 피폐해졌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절망감에 몸과 마음은 무기력해갔습니다. 우울보다 무기력이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었습니다.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가 나한테 밥 좀 차려줬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도 이 와중에 성경읽기와 묵상, 암송은 계속 해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아이들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대는 말에 너무 화가 나서 QT책과 성경책마저 찢어버린 날도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고자 소망하고 몸부림쳐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 없이, 제 삶도 제 믿음도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왜 이리 괴로운 것인가? 분명 우리 아이들이 주님의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움 받길 소망했을 뿐이었는데, 단지 내 욕심일 뿐이었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더욱 날카로워져 분노하고 폭언과 위협, 폭행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같이 죽자고 칼부림까지 가게 되자 패닉상태로 친정엄마께 전화해 펑펑 울며 “제발 우리 아이들 살 수 있게 대신 데리고 가서 키워줘…. 이대로는 나도 애들도 살 수 없을 것 같아.” 호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이 몇 일 몇 요일인지도 까먹고, 기껏 새벽에 사모님께 “이따가 뵈어요!” 인사드리고선 그 날 금요예배 있는 걸 깜박해 차량을 헛걸음하신 게 2주연속이나 있었습니다. 기도할 힘조차 없어서 그저 그냥 신음하며 울 수밖에 없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상태는 성경 방은커녕 교회에 나갈 의지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나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내가 살려면 주님 옷자락 붙잡는 수밖에 없다.’ 라고 본능이 말해주고 있고 성령님이 붙잡아 주셨습니다.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 여부의 중대함이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못 해…”할 때조차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누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제 자신이 가장 애틋하고 소중해서, 제 자신을 돌보기에도 벅차서, 아이들을 위한 희생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난 모성애가 없나보다.’싶고 엄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됐습니다. 하지만 은찬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보니 ‘아… 이 아이가 없으면 난 정말 살 수가 없겠구나. 숨조차 쉴 수가 없겠구나.…….’ 너무도 두렵고 무서운 마음에 ‘내 아이가 무사할 수 있다면 내 목숨쯤이야 내놓지!’ 싶었습니다. 내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아이를, 나를 닮은 이 아이를, 내가 깨닫지 못 하는 중에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었는지…. 이 교통사고가 다신 겪지 말아야할 불행한 ‘사고’에서, 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실히 깨닫는 ‘사건’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자신보다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를 닮은 아이.
몸과 마음이 지쳐,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버겁고 벗어나고만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함이 축복이고 행복임을 지금은 확실히 압니다.
또한 제가 홀로 온전히 묵상할 수 있도록 방 4개짜리 새 아파트 보금자리를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방 3개도 크나큰 감사인데, ‘묵상방’을 따로 내어주신 은혜는 어찌나 더 큰지요. 그 치열한 선착순 분양 경쟁에서 우리 가정을 들어 올려 주사 1등하게 해주심은 주님의 역사하심 외엔 설명할 길 없습니다. 저의 식사 소망 또한 들어주시어 학교 방역 알바에서 급식 보조로 빠지게 해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은찬이와 함께 급식을 먹고 은찬이의 학교생활, 친구와 담임선생님과의 관계도 직접 제 눈으로 매일 보니 어찌나 안심이 되던 지요. 처음엔 포곡도서관 사서 도우미 알바를 희망하다가 성경방 강의가 진행 중이라서 단념했는데, 그 뒤로 코로나로 어린이자료실이 열람 금지되고 여러 학교 상황으로 어차피 못 하게 됐을 거라는 걸, 주님 말씀 배우고 따르는 게 진리임을 새삼 또 깨닫습니다. 지금의 학교 급식 알바가 은찬이의 학교 일정과 심지어 병원생활에 있어서도 전혀 지장 없이 진행될 수 있었음에, 매번 주님의 인도하심과 기도응답과, 제가 그저 스쳐 지나가듯 생각만 했는데도 더 큰 복을 부어주심에 놀랍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믿음의 기업으로 내 사랑하는 자, 자녀를 주심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자녀가 없었다면 주님과 부모님의 사랑을 전혀 깨달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이 깨달음으로 인하여 환난 중에도 기쁘고 감사하고 소망이 생겼습니다. 함께 기도해주시는 우리 구성중앙교회 모든 성도님을 향하여 사랑의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그동안 제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할 땐 몰랐지만, 내가 기도할 힘이 없을 때조차도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동역자로 함께한다 생각하자, 세상 무엇보다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참 든든했습니다.
또한 성경방의 가르침을 통해서, 마치 물고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항을 꾸미고 잘 살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축복하듯이, 우리를 위해 천지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심으로써 인격적인 사랑의 교제와 순종을 원하신 하나님.
처음엔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드셔서 유혹을 받고 죄를 짓게 하셨는지 이해되지 않고 원망스런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부모가 되어 제 자녀를 바라보니, 무엇이든 마음껏 자유롭게 펼쳐 나가길, 그래도 언제 어디서든 내 가르침을 잊지 않고, ‘내 아들딸’임을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엄마”라는 말만큼 감격적이고 기쁜 말이 또 있을까요? 저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에 세상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무얼 해도 사랑스럽지만 “엄마!” 라고 부르며 “우리 엄마가 최고야!”라고 우리 아이들이 말할 때 더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차오릅니다. 제 생명 모든 것을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고, 자녀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고 싶은 마음.
“너는 나다” “내 안에 너 있다” 이 마음이 곧 사랑이요, 하나님이심을…. 이 마음을 이제야 제대로 들여다보니 형용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눈물이 납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주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제가 평생토록 찬양과 경배 올려도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은혜엔 부족함에 송구합니다.
“사랑하는 영란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열심’이 ‘교만’이 되지 않도록 늘 말씀에 비추어 제 자신을 점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성중앙교회가 날로 부흥하고,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 또한 대대손손 굳건한 믿음의 가문으로 세워주소서.
우리 모두가 주님 말씀이 곧 삶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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